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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음을 알고 그 분의 크심을 알며

새벽예배 2023.02.28 | 사무엘상 17장 50-58절 | 이선기 목사




사무엘상 17장 50-58절


50.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51.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칼 집에서 빼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52.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 일어나서 소리 지르며 블레셋 사람들을 쫓아 가이와 에그론 성문까지 이르렀고 블레셋 사람들의 부상자들은 사아라임 가는 길에서부터 가드와 에그론까지 엎드러졌더라

53. 이스라엘 자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쫓다가 돌아와서 그들의 진영을 노략하였고

54. 다윗은 그 블레셋 사람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고 갑주는 자기 장막에 두니라

55. 사울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나아감을 보고 군사령관 아브넬에게 묻되 아브넬아 이 소년이 누구의 아들이냐 아브넬이 이르되 왕이여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매

56. 왕이 이르되 너는 이 청년이 누구의 아들인가 물어보라 하였더니

57. 다윗이 그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그 블레셋 사람의 머리가 그의 손에 있는 채 아브넬이 그를 사울 앞으로 인도하니

58. 사울이 그에게 묻되 소년이여 누구의 아들이냐 하니 다윗이 대답하되 나는 주의 종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니이다 하니라



새벽 묵상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 예화 중에서 노년기의 신앙생활 부분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도의 유명한 시성 타고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점점 나이가 많아 가므로 내가 젓는 노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제는 돛대를 높이 달고 바람을 의지하노라" 여러분 그래야 됩니다. 나이가 점점 많아짐으로 내 육체가 쇠약해져 간다고 한탄하지 말고 내 노력을 너무 의지하지 말고, 이제는 믿음의 돛대를 높이 달고 하나님께서 바람을 주시는 대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것입니다.

육신의 눈이 어두워질 때에 신령한 눈이 밝아집니다. 하늘나라를 보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은 젊을 때에 계시를 받지 아니하였습니다. 나이 많을 때에 밧모 섬에 가서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될 때에 하늘나라의 영광이 그 눈앞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축복은 누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다 허락된 축복입니다. 기억하세요. 나뭇잎은 떨어질 때에 제일 아름답습니다. 과실은 가을에 다 익을 때에 제일 아름답습니다. 곡식도 거두게 될 때에 제일 아름답습니다. 햇빛도 서산 낙조가 제일 아름답습니다. 노년 시대는 인격과 믿음이 완숙하고 아름다워질 때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고, 진실하고, 원만하고, 이해성이 많고, 온전한 그리스도의 인격을 기를 때입니다.

목사님! 이 나이에 내가 뭘 하겠습니까? 하며 나이 들어감으로 한탄하는 인생이 아니라 젊을 때보다 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되고 인격과 믿음의 완숙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어제에 이어 다윗이 골리앗을 첫 번째 물매로 때려눕힌 후에 마무리를 하는 장면과 블레셋이 도망치는 이야기, 사울왕이 다윗이 누군지를 새삼 알게 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50절 51절을 보면서 다윗이 골리앗의 목을 베는 부분을 보고 다윗이 잔인하다 하는 분들도 있는데 이는 당시에 전쟁에서 승전 관례였습니다. 적장의 목을 베어 기념물로 삼는 다윗, 우리가 주목할 것은 50절 맨 뒷 문장입니다. “그를 쳐 죽였으니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무슨 말입니까? 전쟁에서 적장의 목을 베어 승리의 기폭제가 되기 위해 당연히 칼을 차고 있어야 하는데 이 전쟁은 특별한 전쟁이다. 하는 표현입니다.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즉 내 손의 칼이 아니라 다른 손으로 이겼다 하는 표현입니다. 칼이 아닌 세상의 무기가 아닌 하나님의 손이 이기게 하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 1. 첫 번째로 하나님의 능력이 크심을 깨닫고 마음에 새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크십니다. 이 지구뿐만이 아니라 온 우주를 지으시고 운행해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누가 하나님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예레미야 10장 12절에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 명철로 하늘들을 펴셨다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40장 29절에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여러분 여호수아 5장에 보면 이제 가나안 땅을 코앞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갈에서 할례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제 곧 전쟁을 해야 하는 데 전쟁하기 바로 전에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솔직히 말하면 전쟁을 하겠다는 자세가 아닙니다. 야곱의 둘째 셋째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동생 디나를 강간한 세겜 사람들을 할례 받게 하고서 남자들이란 남자들을 다 죽여 씨를 말린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할례 받는 고통이 너무 크기에 전쟁을 앞두고 할 일이 아닌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전쟁은 너희의 힘으로 너희의 무기로 하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싸우신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다음 장 여호수아 6장에서도 또 비슷한 교훈을 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시하신 것은 매일 여리고성을 한 바퀴씩 돌아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6일동안 매일 한바퀴씩 돌고 마지막날 일곱바퀴를 돌기만 했는데 그저 성을 향하여 소리만 외쳤는데 그 견고한 여리고성이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너희들이 칼과 창으로 세상 무기로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하면 이긴다 하심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의 방법으로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싸우려고 하는 자 되지 마시고 대항하여 이길 자 없으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싸워 이기는 자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대조를 이루는 2. 두 번째로 아주 나약하고 연약한 인간의 도망자의 모습이 51절 이후에 등장합니다. 51절 맨 마지막 문장 보십시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블레셋 사람들이 이렇게 도망갈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은 적도 있고 계속해서 이스라엘과 싸워왔던 것을 보면 아주 자신만만해야 할 사람들인데 6척 장수 골리앗이 쓰러지니까 너무 힘 빠지게 흐트러지고 오합지졸로 도망가는 모습, 여러분 이게 블레셋만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 모든 인간의 연약한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너무 사람 믿다가 사람 의지하다가 실망하여 금방 낙담하고 절망하고 회피하는 인간의 한계,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금방 사람을 지도자로 세워 놓고 실망하고 낙담할 것을 아시고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사람 때문에 실망하는 모습은 사실 첫 번째 사람 아담 때부터 있었습니다. 그렇게 믿었던 첫 번째 사람 아담이 그렇게 믿었던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중에 살이었던 하와가 아주 쉽게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아담에게 주니까 너무 쉽게 선악과를 먹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사람 때문에 실망하셨을까요? 아담은 하와와 함께 도망쳐 버립니다. 어디 숨을 곳이 있다고 어디 숨으면 안 보일 줄 알고 도망가는 인간, 아담과 하와가 낳은 아들들은 또 어땠습니까? 동생의 제물만 받았다고 동생을 돌로 쳐 죽이는 가인, 아담과 하와의 믿음을 보란 듯이 깨뜨려버린 동생도 죽이는 믿지 못할 인간의 대표적인 추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뒤에도 계속 인간은 믿을 만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실망스런 일을 계속 저지르는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 결국 노아 때에 홍수를 보내셔서 인류를 전멸하십니다. 믿을 수 없는 인간에 대하여 실망하신 하나님의 눈물의 심판 홍수 대심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 때문에 사람 믿다가 실망하고 낙담하지 마시고 사람은 믿을 존재가 아니라 그저 사랑할 존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이 청년이 누구의 아들인가” 묻는 사울왕에게서 계산하는 인간의 부족함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골리앗이 쓰러지고 도망가는 블레셋 사람들을 끈질기게 쫓아가서 멸하고 53절 그들의 진영을 노략하며 전리품을 회수하는 이스라엘 진영에 큰 승리의 기쁨이 있었을 것입니다. 55절에 사울왕은 군사령관 아브넬에게 묻습니다. “이 소년이 누구의 아들이냐?” 여러분 이 질문을 왜 했을까요? 모른다고 답하는 아브넬에게 56절 그러면 이 청년이 누구의 아들인가 알아보라고 명합니다.

여러분 이런 사울의 질문과 명이 다소 이상하게 들리시지 않으십니까? 왜냐하면 사무엘상 16장에서 사울이 이미 다윗을 만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령이 들려 번뇌하는 사울왕 앞에 수금을 잘 타는 사람으로 다윗은 불려와서 수금을 탈 때에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는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런 다윗을 크게 사랑하여 병기를 든 자로 삼기까지 했던 사울왕, 그런데 지금은 다윗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묻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는 학자들의 다양한 주장이 있습니다. 첫 번째 주장은 사울이 악령에 사로잡혀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차에 다윗과 헤어진 지 오래되어 많이 변한 다윗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주장은 다윗이 사울의 수금 타는 자로 선발되었으나, 항상 그의 곁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사울의 증세가 심할 때만 곁에 있어서 사울이 그를 잘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주장은 사울이 개인적으로 다윗을 잘 알고 있었지만 골리앗과의 결투에 나선 계기로 이 다윗이 어떤 혈통과 신분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는지 잘 알고 싶어서 질문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 가지 주장보다는 마지막 네 번째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는데 즉 사울이 전에 했던 약속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7장 25절에 보면 사울이 골리앗을 물리치는 자에게 주는 상급에 대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의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버지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세금을 면제하게 하시리라” 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이로 보아 사울은 자신이 한 약속을 염두에 두고 아브넬에게 질문을 했던 것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이 네 번째 주장에 기초해 보면 결국 사울왕은 자기가 했던 약속 때문에 준다고 했던 재물에 대해 아까운 마음, 그리고 딸을 준다고 했는데 과연 사위가 될 만한 사람인가에 대한 의구심, 마지막으로 세금을 면해 준다고 한 것에 대한 탐탁지 못한 마음으로 다윗이 누구의 아들인지 확인하고 싶었음을 예상하게 합니다. 왜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사울의 질문과 명을 부정적인 색안경을 끼고 볼 수밖에 없는가? 사울왕이 다윗을 칭찬했다는 부분이 어디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골리앗과 블레셋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구절도 없고 다윗에게 고마움이나 격려하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이나 내일 본문에도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단지 내일 본문 18장 5절에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여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다는 이야기 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칭찬해 주지 못하고 그저 눈에 보이는 손해냐 이득이냐에 집착하는 인간의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준 사울왕 여러분 이게 바로 우리 인간의 부족하고 부끄러운 한계라는 사실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나약하여 사람 믿다가 실망하고 낙심하고 잘해도 칭찬하지 못하고 돈 계산만 하는 우리 인간들을 뭐가 볼게 있다고 사랑하셔서 하나님께서 아들 독생자를 보내사 십자가에 대신 죽게 하셨을까요? 그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그 크심을 찬양하고 또 찬양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새벽에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다시 깨달으시고 또한 하나님의 크심을 깨닫고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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