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예배 2022.04.18 | 에스라 8장 1-20절 | 이선기 목사
에스라 8장 1-20절
1절. 아닥사스다 왕이 왕위에 있을 때에 나와 함께 바벨론에서 올라온 족장들과 그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2절. 비느하스 자손 중에서는 게르솜이요 이다말 자손 중에서는 다니엘이요 다윗 자손 중에서는 핫두스요
3절. 스가냐 자손 곧 바로스 자손 중에서는 스가랴니 그와 함께 족보에 기록된 남자가 백오십 명이요
4절. 바핫모압 자손 중에서는 스라히야의 아들 엘여호에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이백 명이요
5절. 스가냐 자손 중에서는 야하시엘의 아들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삼백 명이요
6절. 아딘 자손 중에서는 요나단의 아들 에벳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오십 명이요
7절. 엘람 자손 중에서는 아달리야의 아들 여사야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칠십 명이요
8절. 스바댜 자손 중에서는 미가엘의 아들 스바댜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팔십 명이요
9절. 요압 자손 중에서는 여히엘의 아들 오바댜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이백십팔 명이요
10절. 슬로밋 자손 중에서는 요시뱌의 아들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백육십 명이요
11절. 베배 자손 중에서는 베배의 아들 스가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이십팔 명이요
12절. 아스갓 자손 중에서는 학가단의 아들 요하난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백십 명이요
13절. 아도니감 자손 중에 나중된 자의 이름은 엘리벨렛과 여우엘과 스마야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육십 명이요
14절. 비그왜 자손 중에서는 우대와 사붓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칠십 명이었느니라
15절. 내가 무리를 아하와로 흐르는 강 가에 모으고 거기서 삼 일 동안 장막에 머물며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 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
16절. 이에 모든 족장 곧 엘리에셀과 아리엘과 스마야와 엘라단과 야립과 엘라단과 나단과 스가랴와 므술람을 부르고 또 명철한 사람 요야립과 엘라단을 불러
17절. 가시뱌 지방으로 보내어 그 곳 족장 잇도에게 나아가게 하고 잇도와 그의 형제 곧 가시뱌 지방에 사는 느디님 사람들에게 할 말을 일러 주고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리고 오라 하였더니
18절.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손자 레위의 아들 말리의 자손 중에서 한 명철한 사람을 데려오고 또 세레뱌와 그의 아들들과 형제 십팔 명과
19절. 하사뱌와 므라리 자손 중 여사야와 그의 형제와 그의 아들들 이십 명을 데려오고
20절. 다윗과 방백들이 레위 사람들을 섬기라고 준 느디님 사람 중 성전 일꾼은 이백이십 명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지명 받은 이들이었더라
새벽 묵상
실존주의 철학자로서 프랑스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지성인 사르트르 Jean Paul Sartre가 1980년 봄 폐부종으로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한 달 가까이 지내는 동안 그는 소리를 지르고, 발악하고, 미치광이처럼 지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병명이 무엇인지 아내에게조차 묻지 못했다고 합니다. 한 세계를 풍미하며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사르트르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르트르가 세상을 떠난 뒤 어떤 독자가 신문에 투고를 했습니다.
"사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 비참했던 이유는 그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른아홉에 짧게 일생을 마감한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목사님은 사르트르보다 앞서서 세계대전 중 나치와 히틀러에 항거하다가 독일 수용소에서 죽어갔습니다. 어느 날 그는 간수가 감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 직감적으로 마지막 순간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함께 있던 감방 동료들에게 하직인사를 합니다.
"형제 여러분! 내게 지금 죽음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시작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집 돌아갈 내 고향으로 갑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올 죽음의 순간을 어떻게 준비하고 계십니까? 어차피 누구나 가야하는 길, 죽음에 대한 공포로 불안에 떨며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주면서 가실 것입니까? 바라기는 돌아갈 내 고향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준비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다가 영원한 안식에 이르는 주의 자녀 되시길 바랍니다. 저는 고향이 경기도 이천입니다. 소도 키우고 교회 밑에 있는 외할머니집에 아랫목에서 평안히 잠들었다가 새벽 교회 종소리에 잠을 깨면 어머님과 외할머님이 일어나 교회 올라가 풍금에 맞추어 찬송하시고 기도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고향마을처럼 우리가 돌아갈 고향은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안식과 평안함이 있습니다. 부활의 산 소망,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다시는 슬픔이 없고 고통이 없는 기쁨과 소망이 있는 고향을 꿈꾸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포로로 끌려가 430년을 노예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후에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70년간의 포로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바벨론이 망한 뒤 바사, 즉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신기한 것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이 주전 605년, 597년, 586년 세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는데, 포로귀환도 세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제1차 포로귀환은 주전 538년 스룹바벨과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제2차 포로귀환은 주전 458년 오늘 성경본문의 지도자 에스라와 함께, 마지막 제3차 포로귀환은 주전 445년에 느헤미야와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포로귀환한 숫자는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우선 1차 포로귀환 때 귀환한 백성이 49897명이었습니다. 3차 포로귀환한 백성은 42360명이었습니다. 2차 포로귀환 때 귀환한 백성은 몇 명이었을까요? 오늘 본문 2절부터 14절까지에 나오죠? 합계가 몇 명인가요? 갑자기 새벽기도 하러 오신 분들 왜 숫자계산을 시키나? 머리 아프게...그래서 “하나님은 아십니다”하고 답하시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제가 2절부터 14절까지 다 합쳐보니 1773명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1차 때하고 3차 때하고 비교해 보니 차이가 나도 너무 많이 납니다. 좀 더 정확하게 하려면 다시 3절부터 14절을 보십쇼. 이 숫자는 족보에 기록된 남자의 숫자입니다. 그러므로 한 가정의 대표 1명의 숫자를 합한 것이 1773명이고 한 가정당 평균 5명으로 생각하면 1773명을 5번 곱하면 약 9000명 정도가 된다는 사실, 여러분 그래도 좀 이상합니다. 아무리 한가정을 5명으로 잡아 계산해도 9000명을 1,3차 때와 비교하면 턱없이 모자른 숫자입니다. 왜 5배는 적게 아주 작은 숫자만이 귀환하게 되었을까? 지도자의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나? 혹시 귀환하다 죽게 되었는가? 여러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찾으면서 우리는 귀한 교훈을 얻게 되는데
1. 첫 번째로 포기하기 어려운 것을 포기했던 이들이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학사 겸 율법사인 에스라와 더불어 제 2차 포로귀환에 참여한 유대인들은 대부분 바벨론에서 생활기반을 다져놓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방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나름대로 안정을 누렸고 신앙생활도 회당을 중심으로 하여 부족할 것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이 모든 안정과 만족을 버려두고 포기하기 어려운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한 이들이었습니다. 숫자는 1차와 3차 때의 5분의 1밖에 되지 않지만 정말 어려운 결단을 했던 이들, 안정된 생활을 버린 이들이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나선 제자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여러분 여기 LA에 와서 그동안 수십 년을 고생고생하면서 폭동도 겪고 수 없이 차별도 당하고 손해도 보고 강도도 당하고 여러 가지 고난을 잘 이겨내고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된 여러분에게 다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면 여러분 미련없이 다 두고 가실 수 있습니까? 물론 가진 게 적은 분은 바로 결단하고 가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모든 것이 안정되고 익숙해진 분들이 그런 요구를 들으면 결단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이 사람들이 바라 본 것은 딱 하나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돌아갈 내 고향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그 마음 꽉 붙잡고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이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정말 돌아갈 고향은 한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내 조국이 아니라 내 본국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한국은 달러 많이 가지고 돌아가면 대우받을 줄 말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달러가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비싸고 좋은 집도 차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 나라는 거듭나면 가는 나라입니다. 믿음으로 가는 나라입니다. 구원의 확신 가지고 가는 나라입니다. 골로새서 3장 1절과 2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결국 포기해야 할 것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2. 두 번째로 한 명도 남김없이 귀환했던 아도니감 자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절부터 14절까지 나온 귀환했던 족보에 기록한 남자 중에서 특이한 표현이 하나 있는데 13절입니다. “아도니감 자손 중에 나중 된 자의 이름은 엘리벨렛과 여우엘과 스마야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육십 명이요” 여기서 “나중 된 자”라는 표현은 무엇일까요? 예 가문에서 가장 아랫 서열에 해당하는 자라는 표현입니다. 가문 전체 중에서 맨 아랫 서열이었던 남자 엘리벨렛과 여우엘과 스마야까지 귀환하였다는 것, 즉 아도니감 가문에 있는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전체가 귀환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60명이나 되는 아도니감 가문 중에서 어떻게 한 사람도 나는 귀환 안 하겠다. 나는 이미 바벨론 사람이다. 아니면 바사 사람이다. 하는 자가, 가문은 가문이고 나는 남겠다 하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 얼마나 아도니감이 존경받는 가문의 어른이셨기에 혹은 모든 자손들에게 사랑받고 헌신했던 어르신이기에 이렇게 한 가정도 빠짐없이 귀환을 결심하게 되었을까? 여러분 아도니감이란 뜻은 “나의 주가 높이 들었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 이름을 보더라도 아도니감이 얼마나 하나님 우선주의로 살았는가? 하는 것을 예상하게 됩니다. 오직 주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워주심에 감사하며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섬기고 사랑해 왔던 아도니감, 저와 여러분. 오늘 새벽에 나온 모든 분들이 아도니감 내 가정의 신앙의 기준, 내 가문의 가장 존경받는 어른 되시길 바랍니다. 나이만 많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우는 받을 수 있을지 모르나 존경받는 어른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믿음의 대표요 가장 존경받는 성경의 어른 아브라함은 어떤 어른이었습니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갈 곳을 알지 못하고 떠나는 절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절대 순종해야 신앙의 어른 되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13장에 롯과 헤어질 때 네가 우하며 내가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리라. 집착을 버리는 욕심을 버리는 어른이었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관용하는 어른 되시길 바랍니다. 창세기 14장에 소돔 땅에 거하던 롯이 잡혀갔을 때에 집에서 길리운 자 318명을 거느리고 가서 롯을 구해옵니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투철한 자가 어른입니다. 소돔왕의 대적과의 전쟁에서 얻은 물품을 취하지 않습니다. 물질에 대하여 집착을 버리는 어른 되시길 바랍니다. 소돔성을 멸하시고자 할때에 중보기도하며 의인 50명 45명, 40명, 30명 계속 하나님께 기도했던 아브라함, 중보기도하는 자가 존경받는 어른입니다. 기도하는 어른 되시길 바랍니다. 모리아산에서 100살에 낳은 아들 이삭까지 바치려고 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 않는 존경받는 어른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새벽에 오신 분들, 영상으로 예배하는 모든 분들이 아도니감같은 아브라함 같은 존경받는 어른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3. 마지막으로 하나님 우선주의,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는 자 되시길 바랍니다. 이 2차 귀환한 자들이 안정된 것을 포기한 것도 훌륭한 결단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런 포기가 그저 내 절제가 아니라 하나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즉 하나님을 최우선 하는 마음에서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15절 보십시오. “내가 무리를 아하와로 흐르는 강가에 모으고 거기서 삼일 동안 장막에 머물며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일을 하는 자들은 구별된 레위자손이 할 일인데 레위자손이 없으니 이것은 도저히 안되는 일이다. 결단하고 사울왕처럼 그냥 대충 제사를 때우려고 하지 않고 17절에 느디님 사람들, 즉 조상 때부터 성전 복사의 책무를 맡은 이들로 하여금 섬길 자를 데리고 오라 하고 18절 이 느디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 레위의 아들 말리의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데려오게 됩니다. 철저히 하나님 우선주의 하나님의 선한 손을 의지했던 귀환자들, 결국 무사히 제 2차 귀환을 완성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새벽에 나와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노인이 되면 잠이 안와서 새벽에 일어나니까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까? 아니죠. 하루의 주인, 일주일의 주인, 일 년의 주인, 내 평생의 주인, 시간의 주인이요. 시간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첫 시간을 드리며 하나님을 우선하며 살기 위함이요,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에스라의 뜻이 바로 돕는다 라는 뜻입니다. 에스라는 정말 그 이름처럼 도와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제 2차 귀환을 성취하게 됩니다.
오늘도 하나님 의지하시고 하나님의 선한 손을 의지하며 승리하는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사람 의지하고 돈 의지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선한 손을 의지하고 모든 도움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고 승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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