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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주시는 이슬같은 은혜

새벽예배 2022.02.26 | 누가복음 16장 19-31절 | 구진모 목사



누가복음 16장 19-31절


19절.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절.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절.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절.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절.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절.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절.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절.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절.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절.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절.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절.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절.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2월 26일 새벽묵상


오늘 본문이 내용을 다시 보면, 한 마을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살았는데 부자는 살았을 때  호화스럽게 살다가 죽은 후에 지옥에 가서 고통을 받았고, 거지 나사로는 살았을 때 고난을 받았지만 죽은 후에 천국에서 위로를 받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믿습니까? 그런데 오늘 많은 교인들이 지옥에 관한 설교는 인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될 수 있으면 지옥에 대한 설교는 안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천국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 지옥에 대한 이야기가 훨씬 많이 있습니다. 


 A.C. 딕스 박사가 말했습니다.  “만일 성직자들이 지옥에 관한 설교를 더 많이 했더라면 오늘 우리 사회는 지옥같은 현실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옥을 믿지 아니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옥은 분명히 있습니다. 우선 본문 말씀이 그것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옥이 분명히 있음을 믿는다면, 그러면 이 땅에서 살아있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첫째는,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시간과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은 다 죽습니다.  조금 먼저 갈 수 있고, 조금 뒤에 갈


수 있지만 결국 죽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건강에 좋다고 골프를 치러 가다가 차 사고로 죽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수영, 등산 가다가 죽기도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인생은 누구냐?  오늘밤에 죽을 목숨이면서 천년 만년 살 줄 알고 자기의 죽음에 대하여 외면하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농부의 비유가 나오는데, 이 부자 농부는 한 번도 심각하게  자기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하나님으로부터 부고장을 받습니다.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는다면, 지금까지 네가 예비한 것이 누구것이 되겠느냐”는 내용입니다.  오늘 밤은 갑자기 임하고, 예고 없이 임하는 밤입니다. 


이 밤은 누구에게나 임하는 밤입니다. 히브리서 9:27절을 보면, “사람에게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 '정하신'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운명입니다. 그리고 죽은 다음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이 심판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천국과 지옥은 살았을 때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갈라진다는 겁니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오라’하십니다.  그럴 때에 ‘아니요’할 사람은 없습니다.  


본문 22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랬습니다. 거지만 죽은 것이 아니라 부자도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죽은 후에 가는 곳은 각각 달랐습니다.  하나는 천국, 또 하나는 지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가장 중대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살았을 때 입니다. 다시 말하면 살았을 때 자기의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겁니다.


죽음이 무엇인가요?  사람마다 심장이 있습니다.  크기는 큰 주먹만하고 무게는 230g 정도입니다.  그것이 1분에 70번 정도 뛰고 한 시간이면 4,200번 그리고 하루동안 십만 팔백 번을 뜁니다.  그런데 이런 심장이 뛰다가 그만 멈출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그런데 이 심장이 젊어서 멈추는 사람도 있고, 노년의 때에 멈추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잠자다가도 멈출 수 있고,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멈출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약4:14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일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살았을 때에 지옥갈 준비를 하는 사람은 지옥에 가고, 천국 갈 준비를 하는 사람은 천국에 가는 겁니다.


믿음 생활이 무엇입니까?  천국가는 준비하는 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


게는 죽는 날이 천국가는 날입니다.  그래서 김익두 목사님은 그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 하늘에서 전보가 날라 왔다고 했습니다.  한 소녀가 집에 가려면 공동묘지를 지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너 공동묘지를 지날 때 무섭지 않니?" 그랬더니 소녀 대답이  “무서울 것 없어요.  묘지 건너편에 제 집이 있거든요”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죽음 건너편에 영원한 내 집이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오른편에 달렸던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했습니다. 그렇


습니다.  믿는 성도들은 당장 오늘 밤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이 확신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오늘 하루도 이런 확신을 가지고 새로운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로 살아 있을 때 거지 나사로를 사랑하라는 겁니다.


부잣집 대문밖에는 거지 나사로가 누워 있습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진 것이라도 먹고 배를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거지 나사로의 몸에는 피부병까지 생겼습니다.  그런데 돈이 없어 약도 바를 수 없었습니다. 개까지 헌데를 핥기 까지 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인생입니까? 그런데도 이 부자는 무관심했습니다. 


부자가 죽어서 지옥에 갔다고 했습니다. 부자이기 때문인가요? 좋은 집에서, 좋은 옷 입고, 좋은 음식 먹고, 호화스럽게 산 것 때문에 지옥에 간 겁니까?  아닙니다.  그 부자에게 한 가지 죄가 있었는데, 무관심이라는 죄입니다.  



부자는 우선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하여 무관심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살았습니다.  또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도 무관심했고, 또 자신과 이웃의 구원에도 무관심했습니다.


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적극적인 죄와 소극적인 죄입니다.  무관심은 바로 소극적인 죄에 해당합니다.  마태복음 25장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도 지옥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무슨 죄로 지옥에 갔습니까? 살인, 간음한 죄인가요?  아닙니다. 아무것도 안한 죄입니다.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땀을 흘리면서 그 것으로 장사하고 있는 동안에,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무관심의 죄가 은근히 많습니다. 부모에 대하여 무관심한 자녀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바쁜 세상이라는 핑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 아내, 가난한 성도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가슴에 안아 줄 수 있는, 포용할 수 있는 애정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무엇인가를 베푸는 겁니다. 나사로에게 먹을 것이 필요했습니다. 상에 남은 나의 부스러기라도 줄 수 있는, 이것이 성도의 미덕입니다.  나사로에게 상처에 바를 약이


필요했습니다. 바르다 남은 연고라도 발라 줄 수 있는, 아량이 역시 성도들의 미덕입니다.  


며칠전 어느 가게를 갔습니다. 갑자기 메트로 버스 기사 복장을 한 사람이, 자신이 버스 기사인데 급해서 들어왔다며 화장실좀 쓰자는 겁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안된다는 겁니다. 그러자 너무 실망한 모습으로 급하게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급했으면, 버스를 길에다 세워두고 들어왔겠습니까? 그런 야박한 마음들을 보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아니 슬펐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사랑이 무엇이냐는 물음 앞에서 무엇인가를 베푸는 것으로 사랑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포도주를 주고, 기름을 주고, 붕대로 싸매주고, 짐승에 태워주고, 주막에 데려다 주고, 데나리온 둘을 주고, 그리고 장차 들 비용까지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이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 무엇이냐는 물음 앞에서 도스도예프스키는 '주린 자에게 빵 한 조각을 주는 것이다'고 했고, 톨스토이는 '추위에 떨고 있는 형제에게 따뜻한 악수를 나누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한 성도가 추위에 떨고있는 가난한 형제에게 입고있는 외투를 벗어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날 밤 천국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천국에서 예수님을 만났는데 자기가 입었던 외투를 입고 계셨습니다.  웬일이냐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의 대답은 “내가 추워 떨고 있을 때 네가 내게 벗어서 입혀주지 않았느냐”고 하시더랍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미담인지 모릅니다.  이것이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될 사랑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 접대하는 것 하늘에서 받을 상급의 조건이 됨을 믿고 이 땅에 살아 있을 때 부지런히 천국가는 준비된 삶을 사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천국들어가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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