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예배 2022.10.20 | 창세기 37장 25-36절 | 이선기 목사
창세기 37장 25-36절
25.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낙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26.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27.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28.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29. 르우벤이 돌아와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30. 아우들에게로 되돌아와서 이르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
31.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32.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33.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35.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36.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새벽 묵상
여러분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풍족한 생활을 하던 부자가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도착하자 천사가 그를 맞이했습니다. 천사는 부자가 앞으로 살게 될 집으로 안내하겠다고 했습니다. 천사를 따라가는 부자는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자신에게 걸맞을 듯 한 대저택들이 거리에 즐비했습니다. 대저택들을 둘러보면서 천사의 뒤를 쫓던 부자는 아름다운 저택들 때문에 가슴이 설렛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어쩐 일인지 대저택이 들어선 거리를 지나면서도 발걸음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거리가 모두 끝나고 아주 허름하고 낡은 판잣집 앞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췄습니다. 천사가 그 판잣집 앞으로 다가서면서 말했습니다. "당신은 앞으로 이 집에서 생활하셔야 합니다." 부자가 보기에는 그곳은 집이 아니었습니다. 깜짝 놀란 부자가 천사에게 따지듯 물었습니다. "나를 보고 이 집에서 살라는 겁니까?
저쪽에 있는 대저택들은 주인들이 없는 것 같은데 내버려두고 어째서 이런 허름한 집을 주시는 겁니까?" 천사가 말했습니다. "죄송하군요. 당신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 올려 보낸 재료로는 아무래도 이런 집밖에 지을 수 없었습니다."
CCC 김준곤 목사님의 칼럼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심고 있는가?” 가라지를 심고 보리를 기대하지 말라. 악습을 심으며 어떤 날 우연히 고매한 품성의 인물이 되리라고 기대하지 말라. 시기와 증오를 심으며 우정과 사랑을 기대하지 말라. 뱀의 알을 품고 병아리가 깨일 것을 기대하지 말라. 중상과 모략을 심고 선의로 갚아지기를 기대하지 말라. 남의 인격을 멸시하는 사람아 그대가 존경받을 것을 기대한다면 탱자를 심어 놓고 감귤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 게으른 사람이 성공을 기대하는 것은 심지 않은 밭에서 곡식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 심은 대로 거두리라. 이것은 인과의 자연 철칙이요, 하나님의 법칙이다. 지식을 뇌 속에 입력한 만큼 유식할 것이며 선수는 연습한 만큼 챔피언이 될 것이다. 육으로 심은 것은 육이요 영으로 심은 것은 영이니 내 인생의 밭에 영원한 하나님을 심어 양질의 영원한 생명을 거두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맞습니다. 시편 126편 5절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하셨는데 심은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밭에 영원한 하나님을 심으시고 영원한 생명을 거두는 그리스도인 되시길 바랍니다.
어제는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잡아 채색 옷을 벗기고 빈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가 오늘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미디안 상인에게 요셉을 팔아버리는 이야기입니다. 25절 시작이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라고 되어 있는데 그 먼 거리 거의 100km를 힘들게 찾아온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고 편안하게 음식을 먹고 있는 형들의 모습을 보면 좀 잔인하다 하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그동안 얼마나 요셉이 꼴보기 싫었으면 이토록 매정하고 나 몰라라 할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진짜 다행인 것은 이렇게 음식을 먹고 그냥 놔두었으면 요셉은 그대로 죽고 말았을 텐데 딱 이 때에 애굽으로 가는 미디안 상인을 마주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26절 유다의 제안으로 27절 이 요셉이 죽지 않고 노예로 팔려서 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때 마침 그 시간에 그 사람을 만나게 하셔서 그렇게 내 삶의 방향을 틀게 하셨을까? 참 신기한 일이고 감사한 일임을 고백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저는 여기 미국에 오게 된 것이 유학도 아니었고 제가 아는 목사님은 이쪽 서부에 있었는데 2008년에 동남부에 계시는 처음 보시는 목사님을 만나게 되어서 갑자기 미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특별하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이 다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은 20에 팔아버리고 아버지 야곱에게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이제 아버지 야곱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게 될 사건을 만들어 냅니다. 지금이라면 이 피가 정말 요셉의 피냐 하고 기관에 보내서 정밀 조사를 했을 테지만 이 때는 피를 구별할 수 없는 때라 요셉이 입었던 채색 옷을 염소 피에 적시고 아버지에게 가지고 가서 요셉의 옷인지 확인하시라고 합니다. 31절 보십쇼.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32절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여기서 우리는 첫 번째 교훈을 얻게 되는데 1. 첫 번째로 옷으로 속였으니 옷으로 속임을 당하는 야곱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지금 아들들의 철저한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는 야곱, 그런데 이 아들들이 속이는 모습은 그 옛날 자기가 아버지 이삭, 눈이 잘 안 보이는 이삭을 형인 것처럼 속이는 모습과 참 많이 닮아 있지 않습니까? 형 에서의 옷을 입고 형처럼 냄새를 풍기며 털을 붙이고 형 에서인 듯 아버지 이삭에게 축복의 기도를 가로채러 들어갔던 야곱이 지금 그대로 자기 아들들에게 옷으로 속임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그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하심의 모습입니다.
목적이 선하면 수단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과 중심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그게 아니십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목적인데 하나님은 수단과 의도를 더 중요하게 보실 때가 많습니다. 부자가 헌금을 잔뜩 제단에 바쳤어도 주님은 부자가 아니라 두 렙돈을 드린 과부가 가장 많이 넣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 다 보는데서 서서 소리 내어 기도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저 뒤에 구석에서 고개도 못들고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통곡하고 소리도 못내는 그 세리의 기도들 들으시는 분이셨습니다. 정말 내가 하는 이 일이 선한 동기와 취지인지 살펴보셔야 합니다. 아무리 결과가 좋아도 시작 또한 중요합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모양부터 시작부터 선한 길에 서 있으셔야 합니다. 이렇게 형 에서를 속인 야곱 800km를 가서 외삼촌 라반에게 속임 당해 첫째 딸 레아와 결혼할 수 밖에 없었고 20년을 종살이 하며 고생고생하고 돌아오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금 아들들이 다 야곱을 속이고 요셉이 죽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선악간에 사람이 그 행한대로 반드시 보응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기억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선한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2. 두 번째로 야곱의 슬픔은 바로 형 에서가 당한 슬픔이었습니다. 에서의 슬픔을 그대로 당하는 심은대로 거두는 야곱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34절 보십쇼 “자기 옷을 찢고 굵은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얼마나 큰 슬픔의 행동입니까? 아마 요셉을 형들에게 가라고 심부름 시킨 자기에 대한 원망이 무지 컸을 것입니다. 나 때문이라고, 이 못난 애비 때문이라고 몇 날 몇일을 울었을 것입니다. 35절에 보니까 심지어 누구의 위로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올에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즉 모든 죽은 자의 처소로 가리라. 즉 죽는 것이 났다고 고백합니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슬픔의 표현입니다. 자기 동생에게 축복권의 기도를 뺏겨 버리고 슬픔 속에서 울부짖었던 야곱의 형 에서의 모습과 지금 이 아들을 잃은 야곱의 모습이 아이러니하게 서로 비교가 됩니다. 창세기 27장 34절 이후에 보면 야곱이 축복의 기도를 가로챈 것을 확인하고 에서가 울었다는 표현이 참 많이 나오는데 사냥꾼이고 남자 중에 남자였던 에서가 울었다는 것은 보통 표현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결심했겠습니까? 이토록 형 에서에게 슬픔을 안겨준 야곱이 지금 그대로 오히려 더 큰 슬픔을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안타깝긴 하지만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또 다른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에 내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나는 네 눈에 피눈물 나게 하리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 행동이 내 말이 다른 사람에게 눈물 나게 만드는 행동과 말이 아닌지를 늘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내 상처가 다른 사람을 찔러 그 사람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해 주는 일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짓고 평생 슬퍼하고 눈물 흘리며 이를 갈게 될 운명인 우리의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사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슬픔의 운명인 우리 인생을 기쁨의 인생으로 소망의 인생 부활을 소망하는 인생으로 인생역전 시켜 주신 은혜,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주님과 똑같이는 할 수 없을지라도 적어도 눈물 흘리는 이에게 손수건을 내밀 수 있지 않습니까? 슬픔이 있는 곳에 위로의 손길을 내어주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속이고 슬프게 하는 야곱이 그대로 속임 당하고 슬픔당하는 모습과 다르게 긍휼을 심어 더 큰 긍휼을 얻게 된 이야기가 앞부분에 나옵니다. 3. 넷째 아들 유다가 구덩이에 던져진 요셉의 생명을 살려내고자 했던 것, 이 구원의 손길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권을 이어가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26절 보십쇼.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 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하면서 27절에 차라리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자 하고 제안합니다. 뒤에 창세기 44장에는 요셉이 몰래 은잔을 넣어 동생 베냐민이 볼모로 잡히자 내가 대신 잡혀 있겠다고 베냐민이 가지 아니하면 베냐민까지 잃어버리면 내 아버지는 도저히 살아가실 수 없다고 자신을 희생하여 자원하여 대신 잡히겠다고 했던 사람이 바로 이 유다였습니다. 바로 이 유다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음에 믿음의 계보를 잇게 되고 바로 이 유다의 자손 중에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오게 되는 거죠. 요셉을 살리고자 했던 마음 생명 구원의 마음, 베냐민 대신 내가 잡히겠다는 마음은 십자가를 대신 지고 인류를 구원하신 메시야의 모습을 미리 예상케 하는 인물이 바로 유다입니다.
긍휼과 관용과 구원의 손길을 심었더니 결국 이 유다를 통해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게 하시는 하나님 이 세상의 축복과 상대가 될 수 없는 영적인 복을 유다에게 그대로 허락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49장 8절에 야곱은 유언을 하면서 넷째 아들 유다를 이렇게 축복합니다.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그 뒤에도 모든 아들들 중에서 가장 최고의 복을 이 유다가 받게 되리라고 야곱은 유언하며 축복하게 됩니다. 결국 심은대로 거두게 되었습니다.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 저와 여러분이 무엇을 심을까를 항상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속임수와 슬픔이 아니라 긍휼과 관용과 구원의 손길을 심음으로 유다가 누린 복보다 더 큰 복을 다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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