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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새벽예배 2022.06.27 | 시편 23편 1-6절 | 이선기 목사



시편 23편 1-6절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새벽 묵상


방금 함께 부르신 두 개의 찬송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 되심을 고백하는 찬송입니다. 568장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라는 찬송까지 해서 이렇게 세곡이 아마도 찬송가에 나오는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송 전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성경 본문 읽으실 때도 거의 안보고 외워서 시편 23편을 읽으시는 분들이 많으셨을 텐데 아마도 시편 23편이 시편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애송되는 시편의 대표 아닐까 하고 여겨집니다.

이 시편 23편은 구조상 이런 특징도 가지고 있습니다. 앞에 시편 22편이 “갈보리산 십자가”의 노래이고 뒤에 시편 24편이 “시온산 왕의 노래”라고 지칭되는데 이 시편 23편은 두 산 갈보리산과 시온산 사이에 펼쳐진 “푸른 초장의 노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간적인 구조적 특징이 있는가 하면 시간적인 특징으로 시편 22편은 과거에 이뤄진 갈보리산 위의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주님을 생각하는 시편이요, 시편 24편은 미래의 장차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이 땅에 재림하실 주님을 생각하는 시편이라는 것, 그래서 바로 이 시편 23편이 과거와 미래 사이에 있는 현재,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시간, 현재 이 땅에서 성취되어가고 있는 예언이 된다는 것입니다.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23편을 나누면서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갈보리산 시온산 인생 고개를 넘어가실 때에 그 사이사이마다 우리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발견하시고 감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또 하나 과거에 역사하신 하나님 우리의 미래, 심지어 죽음 이후까지 영원한 삶까지 주관하시는 목자 되시는 하나님 바라보시면서 현재를 감사하며 지금 이 시간을 최선을 다해 사시는 시편 23편의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서 오늘 설교 끝내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너무 짧은 것 같아서 본문에 놓치지 말아야 할 몇 가지 내용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1. 첫 번째로 이 시편 23편 전체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삶을 충분히 풍성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다윗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절 다시 보십쇼. 뒤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5절 뒤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 6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여러분 이런 표현들보다 더 만족스럽고 충분함을 고백하는 표현이 성경 어디에 더 있겠습니까? 하나님 충분합니다. 넘칩니다. 평생 가득합니다. 하는 다윗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파스칼은 1623년에 태어나 1662년까지 39세의 나이로 참 짧게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는 그 짧은 생애에도 당시 꽤 유명한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발명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는 최초로 진공의 존재를 증명하여 양자 물리학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진공펌프를 발견하였으며 파스칼의 원리, 팡새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파스칼이 죽은 뒤 그의 겉옷 안에 실로 꿰매어 둔 쪽지가 발견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1654년 은혜의 해, 11월 23일 월요일 저녁 10시 30분에서 약 12시 30분까지 불, 철학자들과 배운 자들의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확신, 확신, 감정,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과 당신의 하나님, 하나님 외에 세상과 만물을 잊다. 하나님은 복음서에서 가르치는 방법으로만 발견할 수 있다. 인간 영혼의 위풍,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당신을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당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그분에게서 영원히 떨어지지 않으리라. 그분의 말씀을 절대로 잊지 않으리라. 아멘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창조적인 지성인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파스칼, 그는 인간의 지식으로만 만족할 수 없다고 하면서 결국 이런 유명한 삶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빈 공간이 있다”

시편 23편을 설교할 때마다 꼭 기억나는 유명한 예화가 있습니다. 들어보신 분이 많으실 텐데 처음 듣는 것처럼 들으시길 바랍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웃 교회에 시무하는 후배 전도사님으로부터 자기 교회의 주일 밤 예배에 설교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기로 약속을 하고 날짜가 거의 다 되갈 무렵이었습니다. 전도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주보에 넣기 위하여 설교제목과 성경본문을 알려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본문은 시편 23편 1절부터 6절까지, 그러자 전도사님은 “그러면 목사님 설교제목은 뭐라고 할까요?” 목사님은 제목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하고 대답합니다. 전도사님이 이를 받아 적으면서 “그 다음에는요?” 하고 물었습니다. 아마도 그 뒤에 제목이 뭐가 더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예 알겠습니다. 목사님 잘 주보에 넣겠습니다. 환영합니다. 목사님

약속한 주일 저녁 예배에 목사님은 이웃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안내를 받고 강단으로 올라가 앉았습니다. 받은 주보를 펼쳐 본 목사님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일 저녁 예배 설교제목이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목사님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기가 꽉 막혔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제목에 그 다음 핀잔처럼 전도사님에게 한 말까지 다 그대로 제목에 붙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찬송을 하면서도, 눈을 감고 기도를 하면서도, 제목을 바로 잡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무시하고 설교를 해야 할 것인가 고민이 되었습니다. 고민 끝에 목사님은 그래, 제목대로 설교를 하자! 하고 결심을 했습니다.

준비한 설교의 원고를 다 덮고 갑자기 전혀 새로운 각도로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목을 바꾸니 성경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목사님은 설교를 이렇게 펼쳐나갔습니다. “여러분은 푸른 풀밭의 싱싱한 풀을 원하십니까? 맑은 시냇가에서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싶으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시편 23편에 나오는 양은 그 풍성한 풀밭에서 풀을 뜯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누워 있습니다. 너무 배가 불러서일까요? 아니면 욕심이 없어서이겠습니까? 양은 배가 불러도 몇 시간씩 계속 풀을 뜯고 우물거리며 되새김질을 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목자에게서 오는 참 만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니 나에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내가 그 분의 양이 되니 참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이렇게 외치자 온 교회 성도들이 아멘, 아멘..하며 큰 은혜를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충분케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2. 두 번째로 “누이시며”를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한국에 김동호 목사님도 이 “누이시며” 히브리어로 “라바츠”라는 이 단어를 시편 23편 설교에서 가장 강조하셨는데 이 라바츠는 원래 “배를 땅에 대고 엎드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 단어가 왜 특별하여 깊이 묵상할 단어인가? 목자의 인도함을 받는 양은 원래부터 누울 수 있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동물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서서 자는 동물과 누워서 자는 동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슴이나 새들, 날씬하고 작은 동물들은 다 서서 잡니다. 왜일까요? 약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라도 도망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한편 누워 자는 동물은 다 강한 놈들입니다. 사자, 호랑이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건드립니까? 강하기에 누워 잡니다. 그러면 여러분 양은 누워 잘까요? 서서 잘까요? 양도 약하기 때문에 서서 자는 동물입니다. 누워 자는 양은 한 마리도 없습니다. 누워 자는 양이 있다면 이미 삶을 포기한 양, 간이 부은 양이거나 제정신이 아닌 양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다윗은 원래 목자 출신이라서 당연히 양의 특징을 잘 알았던 다윗은 왜 누이시며, 라바츠라고 했을까? 얼마나 양이 평안하면 얼마나 겁이 없으면 누워서 잘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겁니다.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시니 약하디 약한 양인데도 두려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으니 양이 누워 자게 된다. 바로 다윗 자신이 양같이 약한 자기 자신이 목자 되신 하나님으로 인해 두려움 무서움이 다 없어지고 그렇게 평안을 느낀다 그 고백입니다. 누이시며가 바로 그런 뜻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얼마나 많은 인물들이 이 하나님의 누이시며를 경험하고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밖에 없었는지.. 홍해 바다 앞에서 바다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 한 명도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건너가게 하신 하나님, 다니엘의 세 친구 느부갓네살의 금신상에 절하지 않아서 평소보다 7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에 들어가게 되었어도 털끝하나 상하지 않고 지키시고 보호하신 하나님, 다니엘도 동편 하나님을 향하여 항상 예배하고 기도하다가 모함을 당해 굶주린 사자굴 속에 들어갔어도 사자들의 입을 틀어막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을 때의 그 기쁨,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할 때에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게 하신 하나님, 다 라바츠, 누이시며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독생자 피값으로 살려내신 하나님의 자녀요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당연히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편 139편 9-10절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날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3절에 나오는 “의의 길”이라는 표현도 진지하게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그냥 3절을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하고 짧게 읽고 마는데 이 “의의 길”에서 “길”은 히브리어로 “아갈”이라고 발음하는데 이 아갈은 가파르고 아주 험하고 좁은 길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의의 좁고 험한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이렇게 번역되는 것이 맞습니다. 시편 23편이 그저 평안하고 행복한 표현으로만 쓰여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가는 길은 좁고 험하고 가파르고 고통스럽다는 표현입니다. 꽃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삶 전체를 통해 수많은 전쟁과 고통을 겪으면서 특히 장인 사울왕에게 수년을 좇겨 다녀야 했고, 나중에는 자식들 때문에 큰 고통을 겪으면서 깨달았습니다. 의의 길은 좁고 험한 길이구나. 하나님 이 힘든 길을 목자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묵묵히 끝까지 걸어가게 하옵소서. 저와 여러분도 의의 길을 끝까지 묵묵히 잘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고 꽃길이 아니었습니다. 행복하고 즐거운 길은 아니었으나 의의 길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대신에 겪어야 했던 고통의 길이었습니다. 주님이 대신 당하신 수모와 조롱과 죽으심으로 인해 저와 여러분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은총, 영원한 부활의 나라에 들어갈 소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감사하시고 또 감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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