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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서도 저 곳에서도 그리스도를 전하는 기쁨

새벽예배 2023.08.01 | 사도행전 17장 1-15절 | 이선기 목사




사도행전 17장 1-15절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새벽 묵상

여러분 마태복음 13장에 씨 뿌리는 비유를 못 들어보신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돌밭에 떨어진 씨는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말라 버렸고,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는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결실을 맺었다는 이야기, 우리는 이 비유를 들으면 주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 옥토의 마음이 되자. 말씀을 잘 듣고 받아들이고 열매 맺는 좋은 땅이 되자 하고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참 은혜로운 해석입니다. 그런데 20년 전 부터인가요 이 씨뿌리는 비유를 학자들은 좀 많이 다르게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이 비유가 나오게 된 상황을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예수님은 언제 말씀하셨는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복음 전하라고 여기 저기 보내시고 후에 제자들이 돌아왔을 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러 떠난 제자 중에 어떤 제자는 복음을 아무리 전하고 또 전해도 그 지역이 복음을 배척하는 지역이었기에 그저 길가에 떨어진 씨처럼 새들이 와서 먹어버리듯이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고 몇 달이 지나도 겨우 50여명 정도 밖에는 변화시키지 못했고, 또 어떤 제자는 복음을 전하긴 했는데 돌밭처럼 금방 복음을 놓쳐 버리고 떠나버려 겨우 10여명 밖에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것, 한편 또 다른 제자는 가시떨기처럼 온갖 적들이 많은 곳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어 몇 달을 수고했으나 한 명도 거두지 못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어떤 제자는 몇 달 동안 복음 전하는 동안에 전하는 족족 다 돌아오게 되고 변화가 되어 수백명을 변화시키고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 여러분 이 수백명을 변화시키고 돌아온 제자들의 얼굴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도 이들은 어깨가 팍 올라갔을 것입니다. 스스로가 너무 자랑스러워서 예수님께 칭찬받을 만한 당당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반면 10명이나 혹은 한명도 전도하지 못하고 돌아온 제자들은 어땠을까요? 아마도 실패자의 모습이나 크게 낙담하여 예수님이 잘 보지 못하시는 곳에 자신을 감추고 혹시라도 자기를 부르실까 노심초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수백명을 전도하고 큰 결실을 맺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너희들 수고했다. 그런데 너무 우쭐하지는 말아라. 너희들이 간 곳은 너희들이 뛰어나서가 아니고 옥토, 땅이 좋아서 지역이 좋아서 그런 것 뿐이었을 뿐, 상황이 좋았기 때문이니 교만하지 말아라. 그리고 저 뒤에 앉아 몸을 숨기고 있는 제자야 일어나라. 너무 실망하지 말아라 네가 복음 전한 곳은 가시떨기같이 거의 전도가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내가 갔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많이 힘들었지? 나 때문에 고난당했구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하고 격려하셨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찬송가 496장 “새벽부터 우리” 라는 제목의 찬송 마지막 3절에 보면 가사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씨를 뿌릴 때에 나지 아니할까 슬퍼하며 심히 애탈지라도 나중 예수께서 칭찬하시리니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예수님은 우리가 씨뿌리는 것, 복음 전하는 행동 자체를 그 결과와 상관없이 응원하시고 격려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힘들지만 복음 전하는 자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그 과정과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내게 주신 사명 복음 전하는 일을 씨뿌리는 일을 끝까지 잘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통하여 복음 전해지는 것, 결과와 상관없이 주님이 가장 칭찬하실 일임을 깨달은 바울은 빌립보서 1장 18절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저와 여러분도 이런 기쁨, 다른 기쁨 말고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가장 기뻐하는 행복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깨달음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기쁨입니다. 결과와 상관없이 복음을 전하는 기쁨, 오늘은 바울의 제 2차 선교여행 중에 두 지역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지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1-9절까지 데살로니가에서, 10-15절까지 베뢰아에서 열심히 맡은 바 사명,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두 지역에 복음 전하고 난 후 결과는 생각보다 아주 많이 달랐습니다.

데살로니가에는 4절에 보면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복음을 잘 받아들이긴 했습니다. 그러나 5절에 보면 유대인들은 시기질투심이 생겨 불량한 사람들, 폭력배 같은 이들을 데리고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받아들인 야손을 끌고 고소하고 온갖 바울과 실라에 대한 모함과 비난을 퍼붓게 됩니다. 6절에 보면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이라는 표현이나 7절 중간에 이 사람들이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라는 표현을 보면 유대인들의 시기심이 얼마나 강했는지 얼마나 바울과 실라에 대한 살기가 등등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13절 끝에 보면 베뢰아까지 따라와서 큰 소동을 일으켰던 유대인들, 이렇게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면서 10절에 보면 아무도 없는 밤에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를 탈출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바울과 실라에게 이 데살로니가는 돌밭이나 가시떨기 같은 바울과 실라의 마음을 낙담시킬 수도 있는 그런 선교지였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바울과 실라는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10절 후반부에 보니까 베뢰아에 가서도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이셔서 비록 데살로니가에서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제는 정말 마음이 준비된 이들을 만나게 하십니다. 11절 개역 성경에는 “신사적이어서”라고 헬라어 유게네스테로이를 신사적이라고 표현했는데, 우리가 가진 개역개정 성경의 표현을 보십시오. 11절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들을 만나 복음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 아마도 바로 직전에 데살로니가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받는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마음만 너그러울 뿐 아니라 그 다음 구절을 보십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이 얼마나 감동적인 표현입니까? 12절에 보면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안 전해서 그렇지, 열심으로 전하다 보면 이런 베뢰아 사람 같은 신사적이고 진지하게 복음을 수월하게, 마치 준비된 자처럼 받아들이며 빨리 성장하여 성경을 날마다 사모하게 되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단지 내가 전하지 않아서 놓칠 수도 있는 영혼, 준비된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데살로니가인을 만날 수도 있지만 베뢰아 사람 같은 사람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복음 전하는 이 시대에 바울과 실라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럼 전체적인 큰 그림의 바울과 실라의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선교 말고 이제 세부적인 것 중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을 조금 더 보충하려고 합니다.

1. 첫 번째로 복음을 전하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면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아예 전하지 않기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 전하면서 오는 낙심이 아니라 주로 돈이 없어지거나 몸에 질병이 찾아오거나 자식 때문에 낙심하는 자들 아닙니까? 이제 차원이 달라져야 합니다. 복음 전하다가 낙심의 순간이 와도 곧 베뢰아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낙담하지 않고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전하시길 바랍니다.

2. 두 번째로 바울이 복음을 전한 내용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2절 보십쇼.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에게 강론한 것은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습니다. 3절 보십쇼. 성경의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성경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어떻게 수천년이 넘도록 없어지지도 않고 계속 읽혀오고 전달되고 또 전달되어 온 이 성경을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오늘 또 다시 마음속에 품으시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나 때문에 대신 죽으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천번을 불러도 눈물이 날 수 밖에 없는 고마우신 그 십자가의 은혜, 게다가 영원한 부활의 삶까지 주신 영원히 감사해야 마땅한 분, 그 감사를 회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너무 세상의 일 때문에 연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세상의 문제로 너무 근심하거나 힘들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 져 주시고 대신 죽어주셔서 죽을 운명에서 구원하시고 부활의 길을 열어주신 것을 생각하면 그 외의 것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엇이 그 은혜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감사를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3. 마지막 세 번째로 이렇게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겠다고 소동을 일으키고 바울은 도망 다니고 피해 다니면서 마음속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나도 그 때 그랬어, 몰라서 그랬어”딱 그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도 옛날에 스데반 집사님 돌 맞아 순교할 때 사람들 옷 받아서 지켜보면서 잘 죽는다고 생각했던 어리석은 인간이었어. 몰라서 그랬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 잡으러 가다가 다메섹에서 부활의 예수님의 음성을 듣기 전까지 나도 그랬어. 몰라서 그랬어. 베뢰아까지 쫓아와서 소동 일으키는 이들을 보고서도 바울이 낙심하지 않았던 것은 바울도 예전에 똑같이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 안 믿었으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도 목회자 되지 않았으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아직 몰라서 엉뚱한 길 헤매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이 어느날엔가 복음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기쁨을 깨닫게 될 때까지, 계속해서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전하시길 바랍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열심히 전하시길 바랍니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타오르는 구령의 열정을 가진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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