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예배 2022.04.05 | 마가복음 14장 32-41절 | 이선기 목사
마가복음 14장 32-41절
32절.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절.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절.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절.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절.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절.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절.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절.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사순절 새벽 묵상
2차 대전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한 부인이 식료품 가게에 와서 성탄절 만찬에 아이들을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식료품을 달라고 했습니다. 돈이 얼마나 있느냐고 주인이 물으니 “남편이 전쟁에 나가 죽어서 죄송하지만 돈은 없고 기도 밖에는 정말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기도를 종이에 써 주십시오. 그러면 그 무게만큼 식료품을 주겠소.” 놀랍게도 부인은 접혀진 노트 장을 주머니에서 꺼내 주인에게 건네주면서 “기도 여기 있습니다. 우리 어린애가 지난밤에 아파서 옆에서 병간호를 하며 기도를 적어 두었지요”.하고 대답했습니다.
읽어 보지도 않은 채 주인은 구식 저울의 추를 놓은 곳에 기도가 적힌 종이를 놓고는 “자 이 기도가 얼마치의 식료품 무게가 되는지 달아 봅시다”하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빵 한 덩어리를 놓았는데도 저울은 꼼짝을 안했습니다. 다른 식료품을 올려놓았는데도 저울은 움직이지 않자 주인은 더욱 당황했습니다. 저울에 더 이상 올려놓을 수 없으니 여기 있는 것 당신이 봉지에 담아 가시요. 나는 바쁘니까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눈물 흘리고 감사하며 그 부인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식료품 봉지를 들고 돌아갔습니다. 저울이 고장 난 것을 얼마 후 주인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주인은 가끔 의아해 했습니다. 그때 일이 정말 우연의 일치일까? 왜 그 부인이 어떻게 미리 기도를 써가지고 왔을까? 또 하나 왜 그 부인이 하필 저울이 고장 났을 때 왔을까? 그때 그 부인이 적은 기도문은 “주여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기도할 때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되는 구하고 받는 기도가 있는가 하면, 구하는 대로 받지 못하는 기도도 있습니다. 오히려 내 뜻, 내 육신적인 뜻과 내 바라는 것과 전혀 다른 결과를 얻게 되는 기도. 그래서 나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뜻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기도의 응답, 저와 여러분들이 그런 또 다른 기도의 응답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그리스도인 되시길 바랍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갔습니다. 배 밑에 내려가서 숨었으나 결국 바다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겨우 생명을 유지하다가 물고기를 토하게 하셔서 니느웨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 여기까지의 상황만 보면 우리는 그렇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 하나님은 불순종한 자를 때리셔서 옳은 길 가게 하시는 분이시구나. 큰 물고기 뱃속에 집어넣으셔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드시는 하나님, 그리고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며 간절히 기도했더니 살려주신 하나님, 기도한 대로 응답하신 하나님 이렇게 하고 끝나는 줄 알았는데 그 다음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큰 반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처음 명하신대로 요나가 이제 정신 차리고 그 뜻에 순종하여 니느웨 성읍을 돌면서 외칩니다. 앞으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이 요나의 강력한 외침대로 니느웨가 듣지 않게 되고 망했으면 요나에게 좋았겠지만 웬걸 니느웨 성읍 사람들이 이 요나의 외침을 듣고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 회개하게 됩니다. 니느웨 온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뜻을 돌이키시고 니느웨를 용서하시고 살려주십니다. 요나는 황당했습니다. 아니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하나님께 짜증을 냈습니다. 하나님은 박넝쿨이 자라게 하시고 그늘을 만드셨다가 벌레가 먹게 하심으로 또 화가 난 요나에게 교훈하십니다. 네가 잠깐 났다가 없어진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 십이만 명이나 되는 백성들을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않겠느냐?
여러분 기도의 응답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니느웨가 망해야 기도의 응답입니까? 그건 요나의 생각이었습니다.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에서 겨우 살게 되고 그 모진 고난을 겪으며 요나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한 번 더 뒤집으셔서 더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 요나의 생각과 전혀 다른 기도의 응답을 주셨는데 그게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응답이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의 응답이 아니라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내게 필요한 응답을 주시는 것, 이게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기도 응답하심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는 다른 종교의 기도와 다릅니다.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기도는 종교적인 기도요. 내 소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일방적인 소원과 이루어짐이 아니라 인격적인 기도와 응답입니다. 평생 하나님과 인격적인 기도와 응답으로 교제하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 영원까지 아름다운 교제의 관계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하신 기도를 살펴보면 예수께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와 응답이 바로 인격적인 기도와 응답이었구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 지시기 바로 직전 주님의 기도를 묵상하시면서 우리의 기도가 달라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1. 첫 번째로 주님의 기도는 극심한 고통의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 중보기도, 치유기도, 고통을 없애 달라는 기도,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기도만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극심한 고통 속에서 그 고통을 그대로 하나님께 알리는 것 그것 또한 기도입니다. 먼저 32절 보십쇼.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여러분 겟세마네라는 뜻은 기름을 짜는 틀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다 하는 것을 기름을 짜듯이 자신의 모든 것을 쥐어짜는 아픔으로 기도하셨다 해석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33절을 보십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여기서 “심히 놀라시며” 헬라어로 “에크삼베이싸이”라고 발음하는데 이 단어가 담고 있는 의미가 많기에 학자들이 주목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아니셨다 신성만 가지고 계셨고 인간인 척 하셨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들은 이 단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참 신이시지만 참 인간이신 완전한 인간이신 주님의 심정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 가장 오랫동안 고통을 느끼며 죽어가는 최극의 형벌, 십자가의 고통을 바로 코앞에 두고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놀라고 두려워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 다음절 34절에도 그 당하시는 고통을 또 다르게 표현합니다. 34절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참 인간이신 예수님 그래서 우리의 고통을 그대로 다 겪으시는 체휼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이 고통을 그대로 표현하시고 하나님께 아뢰셨다는 사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들을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시길 바랍니다. 당장 해결해 주시지는 않더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즉시 응답하시지 않을지라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겪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다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느부갓네살의 금신상에 절하지 않아서 풀무불 속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다니엘서 3장 25절에 보면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 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고통 속에 있는 우리를 지켜보실 뿐만이 아니라 우리 함께 하시며 같이 고통당하시고 같이 아파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2. 두 번째로 주님의 기도는 필사적인 기도였습니다. 여러분 필사적인 기도는 필사 즉 죽기를 각오하는 기도, 즉 생명을 거는 기도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가 바로 그런 기도였습니다. 37절 보십쇼. “돌아오사”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표현은 첫 번째 큰 기도가 끝나고 제자들에게 돌아오셨다는 표현입니다. 베드로의 자는 모습을 보시가 한탄하시는 예수님 39절에 “다시 나아가”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크게 두 번째 기도하셨다는 표현입니다. 40절 “다시 오사” 두 번째 기도 후 돌아오셔서 이번에는 그들이 자니 즉 이번에는 베드로만이 아니라 제자들이 다 잠든 모습을 보셨던 예수님 너무 피곤해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답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잠든 제자들, 주님의 기도는 더 간절하고 더 애절한 기도이셨을 텐데 제자들은 전부 다 잠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너무 대조적입니다. 41절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여러분 이 표현이 단순히 세 번 왔다 갔다 하시면서 기도하셨다는 표현일까요? 아닙니다. 기도의 강도가 점점 더 심해지고 세 번 즉 완전수 즉 가장 깊은 기도를 하시고 마침내 마음의 준비가 다 되시고 돌아오신 예수님이셨다는 표현입니다. 누가복음 22장 43절과 44절에 보면 오늘 본문과 동일 본문으로서 우리가 잘 아는 표현이 나오죠.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얼마나 주님께서 간곡히 기도하셨다는 표현입니까? 한 번 두 번 세 번 완전히 기도하셨고 땀방울이 핏방울 같이 될 정도로 필사의 기도를 하신 예수님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기도를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도 필사의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냥 대충 기도하고 계십니까? 식사 때만 기도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혹시라도 사람들이 많으면 그나마 식사기도도 하지 않고 식사하는 우리들은 아닙니까?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지도록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침상을 눈물로 적시며 기도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부르짖는 기도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에 관한 책을 읽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에 대하여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필사의 기도를 본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3. 마지막으로 주님의 기도는 “그러나”의 기도, 철저한 순종의 기도였습니다. 35절과 36절을 보십쇼.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여러분 예수께서 원하는 표현이 얼마나 간절한지 보십쇼.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얼마나 애절한 표현입니까?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여기서 “아빠 아버지”는 아바 호 파테르 라고 발음하는데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의 친밀함을 표현하는 표현입니다. 딸들이 저한테 아빠하고 부르기만 해도 이 아빠의 마음이 뭉클해지는데, 이 아버지를 부르는 그 간절한 간구를 듣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셨겠습니까?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십자가 앞에서의 두려움과 고통, 반복적으로 십자가를 피하고 싶다는 주님의 표현에서 우리는 십자가가 얼마나 괴로운 것이었는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이 모든 간절한 표현들이 그 다음 나오는 한 단어 “그러나”라는 표현에서 대 반전을 이룹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나의 여러 가지 모든 간구와 간절한 바램들과 애절한 그 모든 것들을 억누르고,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여러분 이게 바로 순종입니다. 이게 주님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제가 기도할 때 그러더라고요.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시고 가능하면 좋은 것 주시고 축복을 무진장 주시고 제가 목사니까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주님 위해 일하니까 더 많이 주셔야 타당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끝나더라고요. 나를 꺾는 내 소망을 내려놓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는 주님의 기도가 내 기도에는 왜 그렇게 찾아보기 어려운지.. 철저한 순종의 기도가 아니라 내 소원만 들어달라는 이기적인 기도, 지나치게 기복적인 기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꾸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기도는 그런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그런 기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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